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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날짜 [ 2019년09월29일 18시11분 ]



[
장외시장의 대부 전영길 회장과 여의도의 전경 ]

여의도역에서 5번 출구로 나와 맨하탄 빌딩(구 여의도백화점) 13층에 “선우실업”간판의 사무실이 나온다.

전남 화순 출생의 전영길 회장은 광주고 18회로 전남대 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이 명동에 있는 한국증권거래소(현재는 한국거래소로 변경)였다.

그는 명동에서 2년, 여의도에서 40년을 보냈고, 2011년 한국거래소에서 은퇴한 후 8년째 장외증권시장과 관련한 업무를 하면서 프리스닥 회장을 거쳐 현재는 미래인베스트먼트 회장과 상장기업 나노브럭 감사, 선우실업 이사를 맡고 있다.

[ 네이버 인물검색 창에 뜬 전영길 회장 ]

네이버 인물검색 창에 뜬 인물검색을 보면 전 한국거래소 상무이사, 한국기업지배구조원 부원장, 프리스닥 회장, 법무법인 충정 고문, 동부증권 고문, 레드로버 사외이사 등을 거쳐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영길 회장이 평생 동안 몸담아온 우리나라 증권시장의 역사를 보면 40여 년 전 당시 명동 증권거래소에서는 증권매매가 격탁매매시대를 거쳐, 수작업 매매가 이루어지던 시대로, 시세게시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에 일일이 손으로 먹지를 넣고 매매장을 작성한 후 시세를 공시하기 위해 숫자를 게시판에 써야 했고, 차차 자석식 숫자를 게시판에 부착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 한국증권시장의 역사 ]

당시 시장 내에서 시세변동사항을 무선방송으로 방송하면 전국에 있는 증권회사 지점으로 중계되어 지방에서는 방송을 듣고 분필로 시세게시용 칠판에 적어서 시장시세를 확인하던 방식이었다.
 

[ 주가 시세 게시판 변천사 ]

그러다가 1970년대 중반부터 중동 건설 붐이 일어나면서 1978년, 1979년에는 주식에 대한 붐이 크게 확산되었고, 시세가 급등하고 거래량이 폭증함으로 인해 도저히 수작업만으로는 거래와 시세게시에 한계를 느껴 시세공시에 어려움이 컸다.


[ 격탁매매와 개별경쟁매매 광경 ]

당시 증권시장에는 “여성은 절대 출입금지”라는 사회적 인식(미신)이 매우 컸었다. 그래서 여성은 장중에 시장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된 관계로 매매장 복사지 뭉치를 끈으로 묶어 시장이 있던 2층에서 사무실 1층으로 내려 보내면 여성 입력 요원들이 이를 입력하였고 그 결과가 공시되는 시스템으로 운용되었다.

당시 경제 상황은 급격한 경제성장과 중동에서 건설공사 선급금 10%의 달러유입, 10만 명이 넘는 근로자들의 노임이 달러로 국내에 유입되면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추진에 큰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급격한 증권시장 여건 변화는 거래량과 시세게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점점 더 거래량이 폭주하면서 초기 전산화 단계인 TTY시스템이 도입되었다. 그리하여 1층에서 입력 작업만 하던 여성들이 2층으로 자리를 옮겨서 시장 외부 유리박스 안에서 시장의 시세게시판을 보면서 입력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시장이 열리는 곳에서 여성들이 작업을 할 수가 없어 별도의 시장 밖 유리박스 안에서 문자판에 입력하였는데 남자들이 입력 작업을 할 경우 속도가 늦어서 여성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여성들이 장에 직접 출입하는 것은 여전히 높은 장벽이 되었다.

당시 중동 건설의 특수와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인해 증권시장은 탄력을 받게 되었고, 10% 이상의 고도경제 성장의 활력소가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당시 코스피지수를 환산하면 100 정도의 수준에서 현재 2100 정도이니 21배의 성장을 의미한다.

증권시장의 급속한 팽창과 거래량 증가는 좁은 명동 거래소 건물로는 물리적으로 수용한계를 넘어섰다.

따라서 증권시장은 이전을 위해 1973년에 여의도에 10,000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1976년부터 신축공사를 하여 1979년에 완공함으로써 여의도 거래소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적어도 증권거래소에서만은 1979년 7월 2일은 여성 출입이 금기시되었던 사회적 관습이 무너지고 사실상 여권신장이 되었던 기념비적인 날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의도 거래소 시대가 열리기는 하였지만, 그 당시 여의도는 황무지 같은 곳으로 도로에 신호등도 없고, 국회와 KBS를 비롯한 몇 개의 공공건물 외에는 변변한 건물조차 없어, 점심시간에 식사할 마땅한 식당이 없어 도시락을 싸 와야 할 정도의 황량한 신흥 개발지에 불과하였다.


[ 여의도로 이전한 증권거래소 개관 모습 ]

그 이후 증권시장은 부분 전산화 단계를 거쳐 1997년에 완전 전산화를 이루어 현재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최첨단 전산시스템을 갖춘 선진 증권시장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전 회장은 1977년도에 한국증권거래소에 입사하여 9년 동안을 비주류로 변방의 한직으로만 돌아다니다가 고병우 이사장(건설부 장관역임)이 부임하면서 획기적인 인사에 따라 인사과장으로 발탁되었다.

이에 “혁신적인 개혁”을 주문받아 그동안 달구었던 내공으로 이를 수행한 바 1년 만에 비서실장으로 영전되어 CEO의 최측근 주류에 등극하게 되었다 한다.

[ 명동-여의도의 9년동안 한직에서 내공 쌓기를 회고하는 모습 ]

 

그 후로도 두 분의 이사장을 더 모시면서 여의도 증권거래소의 핵심 멤버로 자리매김을 하면서 CEO의 경영방식을 어깨너머로 배우게 되었다. 전 회장은 지금도 그때가 “자신의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고 소회를 밝히고 있다.

전영길 회장의 생활신조는 “어디에든 비주류라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기회는 반드시 온다. 다만 비주류라고 생각될 때 준비를 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야구경기에서 볼 7개 중 한 개의 기회가 주어질 때 쳐야만 하는 것과 상통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 오늘날 한국거래소의 모습 ]

전회장은 여의도에서 다시 한 번 제2의 포부를 펴고 있으면서, 그가 34년간 쌓았던 사회적 Network이 집 안으로 들어가 버리면 1년 이내에 무너지게 되지만, 계속해서 출근하게 되면 그 Network를 유지·발전시킬 수 있다는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만큼 증권의 세계에서는 인적자원이 중요한 것임을 방증하는 것이다. 


[ 전영길 회장의 여의도 거래소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던 모습 ]

그는 현재도 전남대, 서강대, 서울대 관련 포럼에 열심히 참여하면서 오랫동안 쌓아온 경제․금융 관련 인맥을 유지․발전시켜오고 있으며, 젊은 세대와의 끊임없는 교류를 통해 사고의 혁신을 이루어 가고 있다.

한국거래소는 1956년 설립 이래 유일하게 서울 본사뿐이었으나, 2005년 증권시장 통합과 함께 부산으로 본사가 이전됨으로써 여의도 거래소는 지점과 같은 처지이나 실제로는 모든 주식거래는 여의도에서 다 이뤄지고 파생상품만 부산거래소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증권시장은 상장주식을 거래하는 장내시장과 비상장주식을 거래하는 장외시장으로 구분된다. 장외시장은 비상장기업주식의 매매가 이루어지는 시장으로 일정한 자격과 절차를 거쳐 정규시장인 장내시장으로 가기 전의 시장을 말한다. 그래서 장내시장과 장외시장은 단절된 별개의 시장이 아니고, 유기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다.


마치 연어의 이동처럼 비상장주식의 3부 거래기업들이 상장기업인 1부(유가증권시장),2부(코스닥시장)으로 진출하기 위한 몸 가꾸기 역할을 지원하고 돕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 전영길 회장의 여의도 거래소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던 모습 ]
 
시계추처럼 40여 년 동안을 여의도로 출근하면서 여의도의 마천루 같은 초고층 건물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를 보면서 한국의 증권시장발전상, 경제발전상, 국가의 발전상과 전 회장 자신의 성장 과정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 중국, 일본, 미국 등 장외기업 상장 유치 및 컨설팅 활동 ]

우리나라 경제발전상의 상징인 빌딩 높이로 보면 1970년대에는 을지로에 있던 31빌딩이 랜드 마크였다면, 1980년대 이후에는 63빌딩이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롯데타워 123층 빌딩이 랜드 마크가 되었다.

그 사이에 여의도 금융가에는 한국거래소, 금융감독원, 각 증권회사, 은행 등 금융기관에 IFC, 파크원 빌딩 등이 신축되면서 여의도 맨하탄 빌딩 숲을 이루어냈다.


[ 출근할 때마다 강변북로에서 바라 본 여의도 전경 ]

이를 매일 보고 느끼며 과거로의 회상을 통해서 가슴 뿌듯한 희열감을 느낄 수 있고 여의도 증권거래소의 지킴이라고 자부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 여의도 증권가 40년 지킴이 ]

전영길 회장은 1남 1녀를 두었고, 모두 출가하여 손자 3명을 두고 있고, 아들과 사위 역시 금융권에서 일하고 있으며, 며느리는 의사로, 딸도 증권회사 출신이다.

전 회장은 시간적 여유를 갖고 “가족 이야기”를 가감 없이 집필할 계획에 있다. 자녀들은 부모에 대한 사실을 이해하고 있지만, 손자들이 그것을 이해하는 데에는 다소의 어려움이 있을 수 있기에 이를 정리하여 한 권의 책으로 물려주고자 하는 의도에서이다. 너희 할아버지, 할머니는 이런 분이셨다고 족보 이야기에서부터 지나온 삶의 발자취를 그려보고자 한다고 한다.


[ 칠순잔치에 받은 아버지상패와 단란한 가족들과 함께 ]

전 회장은 건강관리를 위해 헬스 외에 일산에 있는 정발산을 틈나는 대로 부인과 함께 걷는다고 한다. 부인과의 만남이 생애 최고의 행운이었다면서 두 사람이 함께 건강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나름대로 행복에 대한 소신을 “경제적 자립과 부부간의 애정, 출근이 복지”라는 생각에서 여의도 지킴이로서 활력을 찾는 것이라 한다.


[ 일산 자택에서의 일상 모습 ]

그는 현재 23년 전에 신축해서 사는 일산 자택에서 평생 살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을 안고 산단다. 그의 취미는 특별한 것은 없지만 정원을 가꾸고 집 단장을 손수 하는 걸 즐긴다고 한다.

특히 그는 시골 출신답게 가을에 노랗게 익은 감이 서리를 맞아 잎은 다 떨어진 상태로 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정경이 정겨워 마당에 감나무를 5그루씩이나 가꾸고 있다고 한다. 도심에서 맛보기 힘든 정겨운 모습으로 떠오른다.

미국 건국의 국부라는 벤저민 프랭클린은 “준비에 실패하면 실패를 준비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되새기며 전 회장의 건강과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우리 경제의 견인차 역할에 이바지하리라 기대해 본다.

은퇴 후의 생활이나 사회활동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몇 년간은 계속할 수 있을 것 같다. 전 회장을 필요로 하는 기업의 사외 임원 등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여력은 충분할 것으로 보여 정년 없는 활동이 부러움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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